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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대전의 전쟁기념비

이와 유사한 경향은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동상 건립 의 유행에서도 잘 나타난다. 1890년대부터 전(前) 재상 비스마르크 는 독일 민족을 상징하는 인물로 떠받들어졌다. 프로이센의 토지구 족(Junker) 출신이었고 평생 자신의 계급적 이해관계를 떠난 적이 없었던 이 완고한 통치자는 당시의 부르주아지에게는 마치 자신의 이해관계를 대변해주는 인물처럼 비쳐졌다. 당시 이들은 정치적으로 출구가 막혀 있고 미래에 대한 불안에 휩싸여 있던 터라, 통일이 라는 헤라클레스적인 위업을 달성했던 이 카리스마적 영웅에게서 심리적 대리만족을 얻고자 했던 것이다. 비스마르크는 독일 부르주 아의 제국주의적 열망을 실현해줄 일종의 메시아로 숭배되었다. 라인홀트 베가스(Reinhold Begas) 작으로, 1901년 베를린 중심부에서 제막된 비스마르크 동상은 이러한 경향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높이 15m, 폭 20m의 거대한 이 기념물에서 청동의 비스마르크는 갑옷과 철모를 착용하고 한 손에는 검을, 다른 한 손에는 독일제국의 정관 (定款)을 든 채 근엄하게 서 있다. 동상 밑의 적색 화강암 반석은 네 개의 알레고리로 장식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지구를 든 아틀라스나 칼을 버리는 지그프리트(Siegfried) 등 신화적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처럼 신화 속의 최고 영웅으로 격상된 비스마르크의 모습은 당시 독일 부르주아지에게 만연하던 비합리적 충동을 대변하고 있다. 여기서 표출되고 있는 것은 구체적인 정치적 대안이 아니라 밑도 끝도 없는 권력에의 의지' 이다. 권력이 합리적 통제의 범위를 넘어서 무한정 확장되어야 한다는 발상은 정치적으로 볼 때 매우 불길한 징조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민족항쟁기념관'은 전사자 개개인이 아닌 민족 전체를 상징하는 건축물로, 명징한 메시지를 주기 가히 종교적인 신성함을 느끼게 한다.

 

위기시대의 전쟁기념비는 과장된 웅장함과 민족주의적 편향성을 보여준다. 곧 1차 세계대전의 참화가 전 유럽을 덮었다. 전대미문의 대규모 살상을 낳은 세계대전은 그간의 사자숭배 문화를 극단으로 치닫게 하면서 동시에 하나의 전환점을 마련한 계기였다. 세계대전의 참담한 경험은 사자숭배를 더욱 철저히 민족주의화했다. 죽어간 병사들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묘사된 기념비에는 민족적 적대감 이 강하게 표현되었다. 그런데 프랑스와 독일의 경우 일정한 차이점이 노정된다.

 

이미 제3공화정 시기에 쇼비니즘(chauvinism)의 폐해를 경험했 던 프랑스에서는 전후 상당히 다른 양상이 나타난다. 전후에 건립된 전쟁기념비들 중 상당수가 평화주의를 표방했던 것이다. 이들은 전 사자를 민족의 영웅으로 치켜세우는 대신, 전사자의 가족 부모나 과부, 고아의 슬픔을 표현하는 데 주력했다. 최대 격전지 베르덩 (Verdun)에 세워진 한 기념비는 그 좋은 예이다. 여기에서는 이름 모를 한 아버지의 슬픔이 인위적인 의미 부여 없이 사실적으로 묘사 됨으로써 개인의 죽음과 고통 그 자체에 주목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물론 이 시기 프랑스의 전쟁기념비는 평화주의에서 전쟁을 찬미하는 입장까지, 민간인의 고통부터 병사의 전투장면의 묘사 까지 매우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어쨌든 특기할 만한 점은 전쟁기념비가 이제 전몰용사의 기념이라는 한계를 넘어서게 되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