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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사자숭배 과정

물론 이러한 발상의 대전환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사자숭배가 왕조로부터 '주권'을 지닌 민족에게로 이전되어가는 상이 기념비의 '근대화를 지연시키고 있었다. 독일의 사자숭배 문화에서 공화주의적 요소의 도입은 매우 지체되었다.

 

한 승리와 조국통일의 기쁨은 군국주의로 편향된 애국심을 무제한도로 고취시켰고 이는 전쟁기념비의 모습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1871년의 제국 창건을 기념하기 위해 제국의 수도 베를린 중심부에 세워진 '승전기념탑'은 그 높이와 형태에서 말 그대로 '기념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민족의 영광을 드높이는 기세로 기다랗게 하늘로 솟구친 원주기둥은 보불전쟁의 전리품이었던 도금된 포신들로 장식되어 있고 기둥 맨 위에는 황금으로 만든 승리제 아래 놓이게 되었다. 물론 프랑스에서는 차츰 새로운 경향이 선을 보이기 시작한다.

 

프랑스에서도 그랬지만 특히 독일에서는 전쟁기념비의 건립이 민족의 주권을 표방하는 것만큼이나 내부의 반대세력을 배제하기 위한 기제로 사용되었다. 19세기 중부유럽 세계에서 헤게모니를 굳 힌 군사강국 프로이센은 전쟁기념비를 자신의 군국주의적이며 보수 주의적인 조국관을 선전하기 위한 도구로 삼았다. 당시 독일에서는 의회주의와 법치주의, 시민자결권에 기초한 이른바 민족자유주의적 통일안이 논의되었는데 프로이센은 이를 맹렬히 거부하는 입장이었다. 프로이센 국가에 의해 세워진 많은 기념비들에서 군대는 민족의 주권을 대신해서 등장한다. 그것 은 독일 사회의 모든 당파를 넘어선 정치적 최종심급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모든 정치적 저항세력은 조국을 등진 배반자로, 따라서 타도 해야 할 적으로 매도된다. 이들 기념비에서 군대 외에 유일하게 인 정되는 사회세력은 군대 못지않게 보수적인 기득권 세력인 교회이 다. 군대와 교회는 대부분 동일한 가치로 묘사된다. 이러한 프로이센 식 전쟁기념비의 한 예를 보여주는 것으로 독일 남서부 카를스루에(Karlsruhe)에 세워진 '프로이센 기념비 (Preußendenkmal)'가 있다. 프로이센이 이 지역을 점령한 뒤 자국의 전사자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이 기념비는 당대의 낭만주의적 취향을 반영하여 중세 교회의 고딕 양식을 변용했다. 맨 밑에 놓인 정 방형의 받침대 윗면에는 전사자의 이름이 지위에 따라 새겨져 있고, 그 위에는 예수의 얼굴이 양각으로 묘사된 대리석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십자가 위에는 붉은 사석(沙石)으로 만든 아치형 천개(天蓋) 가 놓여 있는데,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네 개의 지주(支柱) 위에는 각각 모서리기둥이 있고 그 위에는 고딕식 주두(柱頭)들이 놓여 있 다. 천개의 지붕 위에는 등신대의 미카엘 대천사가 작은 용 한 마리 를 죽이고 있다. 여기서 프로이센 전사는 거룩한 미카엘의 화신으 로, 이에 저항하는 세력은 악의 화신으로 나타난다. 군사적 승리가 종교적 정의의 실현으로 둔갑한 것이다. 프로이센의 전쟁기념비는 군국주의와 보수주의의 선전도구였다.

 

우선 기념비가 묘비의 역할을 겸하게 된다. 이는 고인에 대한 슬픔과 존중이 원한과 복수의 의식을 능가함을 말해준다. 이와 함께 무 명용사의 죽음이 더욱더 강조된다. 무명용사야말로 조국을 자신의 손으로 지키는 이상적인 공화주의적 시민상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것은 패전의 혼란 속에서 탄생한 프랑스 제3공화국의 표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