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를 거치며 유럽 각지에는 근대적 형태의 전쟁기념비가 수없이 만들어졌다. 그것은 각 시기, 각 민족마다 당대 권력집단의 구미에 맞는 형태로 만들어졌고 시의성을 상실하는 순간 곧바로 잊혀지곤 했다. 19세기 말엽부터 전쟁기념비는 그 제도적 기반이나 사상 적 성격에서 점차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르기 시작했다. 우선 제도적인 면에서 그것은 관료주의의 혐의가 짙었다. 국가행정기관으로부 터 하달된 형식규범은 지나치게 인습적으로 보였으며 이전에는 호소력있던 메시지도 공허하게만 들렸다. 사상적인 측면에서도 위기가 도래했다.
19세기 유럽 정신을 지배했던 역사주의'는 세기말에 이르러 전반적인 퇴조양상을 보였다. 과거를 현재와 미래의 지침으로 삼는 발상은 이제 논리적으로 의심을 받게 되었다. 특히 기념비는 '석화'된 과거의 무게로 현재의 생생한 삶을 억누르는 주범으로 고발되었다. 이미 1870년대에 철학자 니체는 바로 이러한 측면을 꼬집어 근대 특유의 기념비적 역사관을 비아냥거린 바 있었다.
물론 이는 기념비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이는 서구 열강들이 앞 다투어 제국주의 체제로 나아가며 빚어진 세계 규모의 정치적 위기 를 반영한 것이었다. 이제 운명을 건 승부가 기다리고 있는 미래는 지극히 불투명한 것이 되었고, 이에 대한 불안은 비합리적이고 신화적인 사고방식으로 퇴행하는 경향을 낳았다. 20세기 들어서서 근대 적 사자숭배는 새로운 국면에 진입한다. 독일 도시 라이프치히에 건 립된 민족항쟁기념관(Völkerschlachtdenkmal)'이 그 대표적인 예 이다.
나폴레옹에 대한 '해방전쟁의 정점이었던 라이프치히 전투 백주년을 기념하여 1913년 세워진 이 건물은 정치적 축제를 위한 무대로 사용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독일 민족주의에서 해방전쟁은 하나의 기원설화와 같은 것이었다. 당시 독일제국이 보다 강력한 제국주 의의 길로 나아갈 것을 요구하고 있던 독일 부르주아지는 독일 민족주의를 새롭게 고양시킬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고 그 매개체가 될 기념물을 건립하고자 했다. 그들은 잊혀진 '해방전쟁'의 정신을 상기시킴으로써 국외의 적들뿐만 아니라 '제국 내부의 적들에 대해서도 독일적 정신을 수호하고 다가올 전쟁에서 조국의 승리를 도모 하고자 했다. 결국 민족항쟁기념관을 건립한 것은 국가가 아니라 1894년 설립된 독일애국자동맹'이라는 부르주아 민간단체였다. 당시 독일제국 황제이던 빌헬름 2세(Wilhelm II)는 '신민'들이 꾸미는 이 지나친 계획에 오히려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이와 같은 기념관 건립의 대의는 기념관의 모습에 그대로 반영되 었다. 처음부터 '독일 민족의 사당'으로 기획되었던 이 건축물은 그 야말로 하나의 거대한 신전을 연상시킨다.
독일에서는 권위주의적 국가권력이 아직 부재하는 민족정체성을 창출하기 위해 전쟁기념비를 동원했던 것이다.
이 시기 프랑스에서는 비록 예외적인 경우이기는 하지만 전쟁기 녀비의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을 알리는 한 작품이 등장했다. 조각가 로댕(Auguste Rodin)의 걸작품 〈청동시대(L'Age d'Airain)>가 바로 그것이다. 본래 이 작품은 머리 부상을 당한 한 청년병사가 창으로 몸을 지탱하고 서 있는 모습으로 계획되었다.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청년의 손이 감싸고 있는 관자놀이 부위에 부상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러나 창이 제거됨으로써 전혀 다른 성격의 조형물이 탄생하 게 되었다. 그것은 긴 잠에서 깨어난 한 청년의 모습이다. 매우 자연 스럽게 자신의 감정에 몰입해 있는 청년의 몸짓은 조국의 수호나 승 리에 대한 결연한 의지보다는 고통스런 현실과 불확실한 미래- '청 동시대-에 대한 지극히 인간적인 번민을 나타내고 있다. 이 작품 을 통해 로댕은 보불전쟁 이후 유행하던 통상적인 전쟁기념비의 모형에서 벗어나 전쟁의 참화를 겪은 프랑스 청년들의 고뇌와 희망을 형상화했다. 결국 이 작품은 특정한 의미를 진작시키려하기보다 오히려 사라진 의미를 새로이 갈구한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